‘호국의 고장’ 칠곡(漆谷)이 자랑하는 유적지 가산산성(架山山城)
국방수호의 절실함으로 쌓은 호국정신 서린 산성
100여 년 건축··· 국내서 보기 드문 삼중곽 형태
2019-11-15 12:51:45 | 이상인 선임기자

[티티엘뉴스] 칠곡(漆谷)이 ‘호국의 고장’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적지가 바로 가산산성이다. 


팔공산 서쪽 끝자락 가산(901.8m)에 위치한 가산산성(架山山城)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성(築城)으로 칠곡이 호국의 고장임을 상징해 주는 유적지로 그 역사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칠곡 가산산성 진남문의 모습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던 우리나라에는 1200여개의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삼중곽 형태의 완벽한 산성은 칠곡 가산산성이 유일하다. 가산산성은 조선시대 인조, 숙종, 영조 시대를 거치며 약 100여년에 걸쳐 성을 쌓았다. 조선시대 외침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가산산성은 산성 축성 이후 외침이 없어 정작 성으로써의 역할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6.25한국전쟁 당시 마지막 보루로 낙동강을 지키는 치열한 격전지였던 가산산성 전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가산산성 전투에서는 상당량의 폭탄이 투하됐으며, 약 3만여 명의 북한군이 이 지역 일대에서 희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격전지였고, 오늘날 우리나라가 존재할 수 있게 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칠곡 가산산성의 진남문 모습 


가산산성 주차장에 이르면 제일먼저 가산산성의 정문인 진남문이 보인다. 좌우로 말끔하게 축조된 성곽의 중앙에 있는 진남문 위로는 누각이 있어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그 누각 위에는 영남 제일의 방호 시설이란 뜻의 영남제일관방(嶺南第一關防)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진남문을 들어서면 단풍으로 물든 아름다운 오솔길이 이어진다. 지난 산성의 역사를 뒤로 한 채 아름다운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해원정사와 가산산성 외성을 축조한 관찰사 이제재의 불망비, 그리고 6기의 비석이 있다. 

 



절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탐방지원센터가 있고, 6·25 전사자 유해 발굴 기념지역을 알리는 안내판이 보인다. 2000년에 시작된 유해발굴은 11년 동안 국군 전사자 26구를 찾아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어느 방향으로 가도 동문을 만날 수 있다.  
 


▲칠곡 가산산성 진남문을 통해 보이는 가산산성 내의 모습 


동문으로 향하는 숲길은 경사로 인해 조금 힘든 구간이지만 임도와 만나는 삼거리까지 이어진 이 길을 따라 오르면 오르막이 끝나면서 활엽수 사이로 완만한 넓은 길을 만나게 된다. 임도 주변으로는 돌무더기 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가산산성을 쌓았다는 돌강의 화강암이라고 한다.  활엽수 길을 따라 더 오르면 탁 트인 하늘과 함께 세계 최대 규모의 복수초 군락지를 만나게 되며, 지그재그 길을 따라 더 오르면 넓은 분지와 함께 왼쪽으로 동문이 좌우의 성벽과 함께 옛 역사를 말해주듯 우뚝 서 보인다. 


동문에서 중문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직진으로 더 올라가면 중문이 보이고 내리막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가산바위 이정표가 있고, 계단을 오르면 넓은 가산바위가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팔공산, 비슬산, 합천 가야산, 구미 금오산 등 대구지역의 명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칠곡 가산산성 성곽 현황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가산산성 축성을 보면, 인조17년 4월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이명웅이 왕에게 부임인사를 하는 사조(辭朝) 때 가산의 지리적 중요성과 성을 쌓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명, 축성을 허락받았다. 그 해 9월부터 인근 고을의 남정 10만여 명을 징발하여 성을 쌓기 시작해 이듬해인 1640년 4월 일단 내성을 준공하게 됐다.


그러나 막대한 인력과 자금난 및 어려운 공사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민심이 동요되자 이 관찰사는 인조19년 7월 타직으로 이임되고 그 후 9년이 지난 인조 27년인 16489 관찰사 이만(李曼)과 칠곡도호부사 이지성(李枝馨)이 내성을 보수·정비 했다.  


내성이 완성되면서 팔거현이 도호부사가 다스리는 칠곡도호부로 승격됐고, 군위, 의흥, 신녕, 하양 등 네 개의 고을이 산성에 예속됐다. 현을 관장하는 행정의 중심지 및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원래는 성조부에 속해 있었다. 약 180년간 관아를 이 산성 내에 두었다. 

 


▲성안에서 바라 본 칠곡 가산산성 진남문 모습 


이후 52년이 지난 숙종 27년인 1701년 관찰사 이세재(李世載)가 외성을 완공했다. 외성은 숙종 26년부터 27년 사이에 석축 됐으며, 둘레는 3,754보, 1,890첩의 여장을 두었다. 성문은 남쪽에 만들고 북·동·남쪽에 암문을 설치했다. 


또 다시 40년 후인 1741년 영조 17년 관찰사 정익하(鄭益河)의 요청으로 내성 가운데 길이 602보, 402첩의 여장과 중성문 등의 중성벽이 완성되면서 전체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외성, 중성, 내성을 갖춘 삼중곽 형태의 가산산성이 비로소 최종 완성됐다. 


1639년 시작되어 1741년에 완성된 가산산성은 약 100여 년간에 걸쳐 완성됐다. 산성의 전체 둘레는 11.1Km로 한양도성, 부산금정산성, 북한산성, 남한산성 다음인 다섯 번째로 길며, 면적 2.2㎢로 면적만으로는 4번째 큰 성으로 손꼽힌다.  

 

 
▲잘 보존되어 있는 칠곡 가산산성의 성벽 모습  


가산산성은 산 정상에서부터 계곡 아래까지 감싸 안은 포곡식과 산 정상부를 테로 두른 것 같은 테뫼식 축성법을 섞어 자연의 지형을 잘 이용해 돌로 쌓아 만든 성으로 외성, 내성, 중성이 시대별로 다른 시기에 축성되어 조선시대의 건축 기법을 시대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154년간 사용되어 왔던 가산산성은 1895년 고종 32년에 폐성됐으며, 그 후 한국전쟁과 1954년 대 홍수로 성내의 많은 건물 및 성벽이 훼손됐지만 아직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가산산성은 길이 약 4km, 둘레는 4,710보(步)이고 적으로 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 위에 쌓은 담장인 여장(女墻)이 1,887첩(堞), 적이 모르게 지나드는 비밀 문인 암문 8개, 대포를 쏘는 누각인 포루 4곳, 높은 곳에 위치하여 유사시 지휘 하는 곳으로 장대인 진남대(鎭南臺) 1곳, 산성 축조에 필수적인 우물 2곳, 연못 9개소, 창고 7개소, 빙고(氷庫) 1개, 사찰 4곳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벽을 따라가며 성문, 암문, 수문, 곡성, 치성, 포루 등 100여개의 시설이 현존했다. 

 


▲칠곡 가산산성 진남문의 우측 모습 


중요시설은 내성 안에 있으며 중성에는 이 산성에 입보(立保)할 예정된 네 고을의 창고가 있어 비축미와 군기(軍器)를 보관하여 유사시에 사용하게 했다. 성은 외성 남문으로 들어가게 되며, 성 주변에는 송림사를 비롯한 신라시대의 절터가 많이 있다.


남문의 홍예(虹霓)는 1954년 집중 폭우로 반파되고 수구문과 성벽 일부가 유실됐으며, 그 밖의 성벽과 암문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세는 천주사지(天柱寺址)로부터 급경사를 이루어 가파른데 약간 평탄해진다. 성문은 외성의 남문이 홍예문이며, 다른 성문들은 앞쪽만 홍예이고 뒤쪽을 평거식(平据式)으로 만든 특수한 문의 구조로 되어있다.


남보루(南堡樓)는 성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데 여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따로 성벽을 현대의 교통호(交通壕)처럼 설비한 용도(甬道)가 있어서 조선후기의 축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칠곡 가산산성이 위대한 문화유산임을 알리고 있다


가산의 해발 901.6m에서 산골짜기를 에워싸 해발 600m에 이르도록 내·중·외성을 축조하였는데, 현재 사문지(四門址)와 암문(暗門)·수구문(水口門)·건물지 등의 시설이 일부 남아있다. 산성 별장이 거처하는 위려각(衛藜閣)을 비롯하여 성안에는 객사(客舍)인 인화관(人和館)을 비롯한 관아와 군관청, 군기고, 보루(堡樓), 포루(砲樓), 장대(將臺)가 설치되어 행정적이라기보다는 방어를 위한 군사시설이 압도적인 군사용 진성(鎭城)의 면모를 갖추었다.


1954년 집중 폭우로 남문에 홍예(虹霓)는 반파되고 수구문과 성벽 일부가 유실되었다. 그 밖의 성벽과 암문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세는 천주사지(天柱寺址)로부터 급경사를 이루어 가파른데 약간 평탄해진다. 성문은 외성의 남문이 홍예문이며, 다른 성문들은 앞쪽만 홍예이고 뒤쪽을 평거식(平据式)으로 만든 특수한 문의 구조로 되어있다.

 


▲칠곡 가산산성이 영남 제일의 방호 시설임을 알리고 있는 진남문 누각에 걸린 현판 모습 


성내의 사방에 포루, 장대, 남창, 군창, 영창, 군기창, 장적고 등의 창고와 문루가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는 곳은 없다. 다만, 남창마을과 북창마을의 명칭에서 남창지와 외북창지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 외, 중성과 동문, 동암문은 보존되고 있다. 또한 산성 내에는 보국사, 천주사 등 많은 사찰이 건립되어 승장을 뽑고 승려들을 모아 궁술을 연습시켰다고 하나 현재 일부 사지의 주위에 당간지주만 남아있으며, 장군들이 마셨다고 하는 우물인 ‘장군정(將軍井)’이 남아 있어 산성 내에 많은 병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1954년 7월 26일 폭우와 산사태로 외성의 정문인 남문성벽과 수구문이 붕괴됐으며, 이때 외성 진남문 위쪽에 약 50호 200여 명의 주민이 살던 남창마을 중 35호가 매몰되면서 24명이 사망하게 되면서 미군부대의 지원으로 남원2리에 새로운 마을인 신흥(新興-새마을), 신남창(新南倉-새남창)을 조성, 이주했다. 

 


▲칠곡 가산산성 진남문에서 바라 본 성안의 모습 


지난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남문루 및 남문의 성곽과 수구문, 여장(女墻 · 성위에 낮게 쌓은 담. 활이나 총을 쏘기 위한 타구) 185m, 중문 등을 복원, 중수했으며, 1992년에는 중문을 보수했고, 1999년에는 산성 진남문여장, 동문 해체보수, 동문 성곽 99.5m를 보수했다. 


가산산성 서북쪽 성벽 사이에는 가산바위가 있다. 바위의 상면은 270㎡ 규모로 약 80평정도 되는 넓은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성인 100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바위다. 이곳에서는 대구광역시의 전경이 한 눈에 볼 수 있다. 


가암이라고도 불리는 가산바위에는 두 가지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바위 윗면 동쪽 끝에는 지금은 메워져 있지만 옛날에는 큰 구멍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신라시대의 고승이었던 도선대사가 전국을 유람하던 중 이 바위에 와서 둘러보니 가암의 지기(地氣)가 너무 세어 이를 억누르기 위해 바위에 구멍을 뚫어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었다고 한다. 

 


▲칠곡 가산산성 진남문 누각과 성벽의 일부 모습  


또 다른 전설은 가산고을에 한 장사가 살고 있었는데 마을에서 소문난 장사여서 사람들은 그를 가산장사라고 불렀다. 어느 날 그 장사가 금강산 유람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가산에 이르러 쉬고 있는데 금강산 유람 때 주운 조약돌 중 하나가 굴러 가산 아래로 떨어졌는데 그 조약돌이 사실은 작은 조약돌이 아니라 거대한 바위였으며 산성 밑에 떨어진 그 바위가 바로 지금의 가산바위라고 전해진다. 또한 가산바위 한 가운데 있는 커다란 구멍은 그 장사가 산선에 앉아 쉬면서 오줌을 누었는데 그 줄기가 아래의 가산바위에 떨어져 그로 인해 뚫린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가산산성 남문 안에 있는 해원정사 산신각 옆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 기와집이 있고, 그 안에 관찰사 이세재 불망비가 건립되어 있다. 이세재는 인조26년(1648년) 출생한 나주목사 하악의 아들로서 현종 10년(1669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전설사 별검으로 등용되어 의금부도사·감찰·공조좌랑, 남원현감·병조좌랑, 지평, 동래부사, 병조·예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숙종 24년(1698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왜관수리 및 전정에 관한 사무와 더불어 가산산성의 축성에 정성을 기울였다. 임기가 만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산 외성의 축성 때문에 숙종 27년(1701년) 2월 8일까지 재임하다가 예조참의로 전임됐다. 그가 전임된 후 숙종 34년(1708년) 그의 공덕을 기려 고을백성들이 비와 비각을 세웠다.


가산산성은 지난 1971년 사적 제216호로 지정됐으며, 주변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칠곡 가산산성 = 이상인 선임기자 lagolftime@ttlnews.com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