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미술, 루이즈 부르주아의 개인전 '유칼립투스의 향기'
국제갤러리 전시··· 고통과 상처를 정화·치유·복원하는 투쟁
2021-12-30 11:51:44 | 이린 아트칼럼니스트

한번 얼룩지고 구겨진 종이는

아무리 다시 펴고 말려도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마음의 흉터가 이와 같다

 

상처받고 무너진 나를 방치하면 안된다

그런 하루가 쌓일수록 나의 어깨에 걸머진 인생이 무겁다

중심을 잡아주는 휴식과 치유가 필요하다

 

애초에 나와 한 몸이었던, 이제는 노쇠한 엄마에게 짐을 내려놓는 대신,

나는 치유의 미술관으로 간다.

 

 

[티티엘뉴스] 호암미술관 앞마당에는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옮겨진 루이즈 브르주아 (Louise Bourgeois)의 거대한 거미 조각상이 있다. 거미는 성실함과 배려 존경과 연민의 상징이다. 거미는 자식들의 먹이로 자기 몸을 내주기도 한다. 엄마라는 작품이다.


▲[국제갤러리] 뉴욕 웨스트 20번가의 자택 계단에서 내려오는 루이스 부르주아, 1992년

 

자신의 과외 선생과 바람난 아버지, 성적으로 문란한 언니, 포악한 남동생까지…, 평생 그녀에겐 가족사가 트라우마였다. 엄마와 자신의 상처, 모성애를 작품에 투영했다. 그녀의 초기작에 실과 바늘을 이용한 타피스트리 작품이 많다. ‘그녀에게 찌르고 꿰메는 행위의 반복은 파괴와 치유의 반복이었다. “바늘은 훼손된 것을 치유하는 데 쓰인다. 바로 용서를 의미하는 것!” 그녀에게 예술은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정화하고 치유하며 복원하기 위한 투쟁의 행위였다.

 

그녀의 전시가 국제갤러리에서 진행된다. Louise Bourgeois 의 개인전 <유칼립투스의 향기 The Smell of Eucalyptus>라는 제목이다. 조각 및 평면 작품을 아우르는 이번 전시는 2012 년에 이어 10여 년 만에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부르주아의 여섯 번째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 포함되는 특정 작품의 개별 제목이기도 한 제목 <유칼립투스의 향기 The Smell of Eucalyptus>는 부르주아의 후기 작품에서 특히 주요하게 조명되는 기억, 자연의 순환 및 오감을 강조하는 문구이다. 1920 년대 후반 프랑스 남부에 거주하며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던 젊은 시절의 부르주아는 당시 유칼립투스를 약용으로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유칼립투스는 작가에게 있어 어머니와의 관계를 상징하게 되었고, 특히나 작가의 노년기에 두드러지게 표면화된 모성 중심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매개체로 기능했다.

더 나아가 유칼립투스는 작가의 추억 기제를 촉발하고 과거를 현재로 소환해낼 수 있는 우리의 감각이 지닌 힘에 대한 믿음의 방증이기도 하다(작가는 생전 스튜디오를 정화 및 환기시키기 위해 유칼립투스를 태우곤 했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삶 곳곳에서 실질적, 상징적으로 쓰인 유칼립투스는 부르주아에게 미술의 치유적 기능에 대한 은유이다. 전시의 주축을 구성하는 작품은 <내면으로 #4 Turning Inwards Set #4> 연작으로, 부르주아가 생애 마지막 10 여 년 간 작업한 일련의 종이 작품군이다.


▲[국제갤러리] 루이스 부르주아_TURNING INWARDS SET #4 (JUST LIKE ME)

 

39점의 대형 소프트그라운드 에칭(soft-ground etching) 작품으로 구성된 본 세트는 부르주아가 해당 시기에 몰두했던 도상, 즉 낙엽 및 식물을 연상시키는 상승 곡선, 씨앗 내지 꼬투리 형상의 기이한 성장 모습, 다수의 눈을 달고 있는 인물 형상, 힘차게 똬리 틀고있는 신체 장기 등 작가의 조각 작품을 참조하는 추상 및 반추상 모티프들을 성실하게 언급한다. 물리적 긴장과 완화, 풍경과 신체, 내면과 외부 현실 간의 간극을 역동적으로 오가는 작품들이지만, 제목이 암시하듯 그를 지배하는 감성은 자기성찰이다.

 

특히 <내면으로 #4> 연작은 부르주아의 후반 형식 및 주제 실험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 이후 제작한 <잎사귀 (#4) Leaves (#4)>, <너울 Swaying>, <통로들 (#3) Passages (#3)>, <높이, 그리고 더 높이 Up and Up> 등 동일한 원판을 기반으로 손수 칠해 만든 대형 판화 작품들을 통해 작가가 지속적으로 개발해나간 도상학적 어휘록을 설정했던 셈이다.


▲[국제갤러리] 루이스 부르주아_LEAVES (#4)

 

이러한 텍스트와 이미지의 조합은 부르주아와 판화의 평생에 걸친 인연의 시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일찍이 1947 년에 그는 9 개의 판화를 9 개의 수수께끼 같은 우화와 짝을 맞춘 작품집인 <그는 완전한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He Disappeared Into Complete Silence>를 출간한 바 있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업세계는 조각부터 드로잉, 설치, 바느질 작업까지 다양한 소재와 장르의 작업을 통해 시대적 특성이나 흐름으로 규정지을 수도, 한 마디로 정의하기도 불가한 고유성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 역시 부르주아의 후기 평면 작품들을 작가의 커리어 전반으로부터 선별한 조각 작품들과 함께 제시함으로써 동일한 형식적, 주제적 고민을 다루는 다른 시대, 다른 매체의 작품군 간의 흥미로운 대화를 촉발한다. 전시는 내년 225일까지.

 

이린 아트칼럼니스트 art-together@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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