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 주논개의 혼과 영정 있는 논개사당(論介祠堂)·의암사(義巖祠)
인애·의용·충렬이 담긴 주논개의 3대 정신 새롭게 다가와
최근 한일 정세 악화··· 평소보다 20% 이상 방문객 수 증가
2019-09-01 16:56:56 , 수정 : 2019-09-01 22:56:04 | 이상인 선임기자

[티티엘뉴스] 한·일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요즘, 논개의 영정이 모셔진 논개사당에서 그녀가 일본에 대항했던 강한 정신과 그 의미를 되짚어 보자. 
 


▲논개사당의 입구에서 본 모습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중간 생략)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불멸의 민족혼으로 불리는 의암(義巖) 주논개(朱論介) 사당 입구에는 변영로 시인의 논개가 그의 넋을 위로하는 듯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하고 있다. 

 


▲논개사당의 내삼문인 휘광문의 모습


논개사당(論介祠堂)은 장수읍 남산 남쪽에 위치한 의암 주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정식 명칭은 의암사(義巖祠)이다. 장수삼절 중 한곳인 이곳은 지난 1981년 4월 전라북도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됐다.  

 


▲기념관에는 논개의 유품 일부와 남편인 최경회의 유품 등이 보존되어 있다


논개는 선조 7년인 1574년 9월 3일 전라북도 장수군 임내면 대곡리 주촌 부락에서 4갑술의 특이한 사주를 안고 부친 주달문과 모친 밀양 박 씨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친을 여윈 논개는 숙부인 주달무에게 의탁해 있었는데 숙부가 임내면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보내자 그곳에서 도망쳤다가 붙잡혀 장수현감 최경회로부터 재판을 받게 되었고, 다행이 무죄를 풀려났다. 그러나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을 안 최경회 장수현감의 부인이 주선해 17세 때 장수현감 최경회(崔慶會)의 후실로 들어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기념관에 있는 진주성 전투 모형


그 후 선조 25년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는 의병을 모아 왜적을 물리치는데 앞장섰고, 그 공을 인정받아 1593년 4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면서 진주로 부임하게 된다. 그러나 그해 6월 29일 진주성이 왜적에 함락되기에 이르자 진주성 함락의 책임을 통감한 최경회 장군은 김천일, 고종후 장군 등과 더불어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게 이른다. 

 


▲기념관 내 모습


이때 지아비를 잃은 논개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 나라와 남편을 위해 꼭 원수를 갚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이후 행동으로 옮길 기회를 엿보던 논개는 왜적들이 승전 기념 연회가 촉석루에서 벌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촉석루에 들어가기 위해 기녀로 가장했다. 당시 이곳을 출입할 수 있는 것은 관에서 속해 있는 기녀(관기)들 만 출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의암 주논개 의인상이 제정되어 있다. 기념관에는 의인상 설명과 수상자들의 모습도 있다


촉석루 연회장 잠입에 성공한 논개는 왜장인 게야무라 로쿠스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고, 마침 왜장이 논개를 마음에 들어 하는 틈을 이용해 술에 취한 왜장을 남강가의 바위 쪽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논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손가락에 가락지를 낀 양손으로 왜장의 허리를 껴안고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논개가 나라와 남편을 위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이었다.

 


▲비각 속에 보존되어 있는 논개 생장향수명비의 모습


그 후 조정에서는 그녀의 순절을 높이 찬양하며, 예문관으로부터 의암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진주 촉석루 곁에 사액 정문을 지어 그 넋을 위로, 추모하게 하였고, 투신한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게 됐다. 1846년 장수현감 정주석이 논개의 순절을 높이 찬양하고 그녀가 장수태생임을 기리기 위해 논개 생장향수명비(生長鄕竪名碑)를 세웠으며, 논개 생장향수명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1650년 임진록에 나와 있다. 장수군청 앞에 세워졌던 이 비석은 일본 강점기 때 일본이 비석을 깨버리려고 했는데 이를 알고 장수 청년들이 밭에 묻어 보존했다고 한다.  

 


▲기념관에 있는 논개에 대한 안내


지난 1954년 장수 군민들의 성금으로 촉석루 곁에 논개사당을 지어 의암사라 명하고, 위로하는 추모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지난 1974년 현재 위치로 옮겼으며, 매년 음력 9월 3일 주(朱)논개제에는 각종 문화행사를 치르고 있다. 

 


▲관광객들이 내삼문으로 올라가고 있다. 한일 갈등으로 인해 관광객들이 약 20% 증가했다고 한다


지난 1954년 장수군내 각계각층에서 성금을 모아 남산공원의 아래 봉우리 꼭대기에 논개사당을 창건하고 의암사라 불렀다. 1960년대 후반부터 추진된 성역화사업으로 1973년에 문화공보부 승인을 얻어 정화사업에 착수, 장수읍 두산리 2만 여 평의 부지를 조성하게 됐다. 그 후 1974년 사우(祠宇)를 이건(移建)하여 삼문(三門)과 담장을 설치, 주위 조경공사를 시행하고 관리사 및 광장을 조성했으며, 주논개 생장향수명비도 이곳으로 옮겼다. 

 


▲내삼문인 휘광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의암사가 창건된 뒤에 주논개가 순절한 7월 7일을 택하여 추모대제(追慕大祭)를 모셔오던 중 지난 1968년부터 이날을 장수군민의 날로 지정하고, 군민의 날 행사와 겸하여 대제(大祭)를 모시는 것으로 결정되어 계속하고 있다. 지난 1981년 4월 1일에 기념물로 지정됐다. 

 


▲변영로 시인의 논개가 세겨져 있는 시비석


논개사당은 의암호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주차장을 지나 입구에 들어서면 논개를 그리는 변영로 시인의 글귀가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고, 그 옆에 논개사당을 알리는 의암사(義巖寺)라고 쓰인 입석이 나란히 서 있다. 

 


▲최근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논개사당  


논개사당은 약 2만 여 평 대지에 외삼눈 ,내삼문, 충의문 등 세계의 문으로 층을 이루고 있다. 구조는 안마당과 중간을 막은 중문 그리고 중문 위로 사당이 설치된 구조다. 경내 곳곳에는 약 50~60년 된 붉은 소나무인 적송 392그루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논개 생장향수명비석이 보존되어 있는 비각 모습


넓은 잔디로 조성되어 있는 논개사당 광장의 중앙으로 들어가면 22개의 계단이 보이고 계단을 올라가 첫 번째 문인 외삼문을 지나면 우측에 생장향수명비석이 보존되어 있는 비각이 있고, 중앙에는 소나무가 당시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 지키고 있다.

 


▲논개사당 내에 있는 기념관의 모습


좌측에는 논개가 왜군 장군을 안고 강으로 몸을 던지게 된 배경을 그림으로 표현해 놓은 기념관이 위치해 있다. 기념관에는 논개의 일부 유품과 남편 최경회 장군의 유품이 소장되어 있고, 논개에 대한 역사적 이야기들이 기록, 전시되어 있다. 

 


▲내삼문인 휘광문의 모습. 커다란 태극문양이 눈에 띈다


15m 쯤 걸어가면, 22개의 계단이 있고, 그 위에는 내삼문인 휘광문을 지나게 된다. 다시 2개의 계단으로 이뤄진 20계단을 올라가면 충의문이 있고, 이곳을 지나면 논개의 영정이 모셔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건축된 사당이 바로 앞에 우뚝 서있다. 사당 내에 있는 논개 영정은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렸으며, 당시 부통령이었던 함태영(咸台永)이 친필로 쓴 의암사란 현판이 걸려있다.  

 


▲논개사당(의암사) 모습. 의암사라고 쓴 현판과 사당 내에 모셔진 논개의 영정이 보인다


이곳 사당에서는 논개의 생일인 음력 9월 3일이면 매년 제사를 지낸다. 특히 논개사당 전체는 장수군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깨끗하게 잘 가꾸어져 있고, 사당이 있는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의암호를 비롯해 둘러싼 주변산세와 어울린 장수군 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매년 약 4000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최근 한일 관계 악화 영향 때문인지 약 20% 정도 관광객이 증가하고 있다고 관계자는 설명했다. 

 


▲논개사당에 모셔진 논개 영정 모습. 김은호 화백이 그렸다


충절의 표상인 의암 주논개의 정신은 ▶제 몸을 불살라서 주변을 밝히는 인애정신(仁愛精神), ▶패권주의에 맞서 끝내 항거한 의용정신(義勇精神), ▶사대부가 아닌 아녀자의 몸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지아비를 사랑한 충렬정신(忠烈精神) 등으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논개사당에서 내려다 보면 의암호를 비롯해 둘러싸인 산세와 장수군의 모습이 보인다


최근 일본의 역사의식에 대한 변화와 사과가 없는 가운데 오히려 일본이 먼저 무역 갈등을 조장하면서 촉진된 한일 간의 냉전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정부도 일본에 대한 강력한 정책으로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는 우리 국민들의 자발적인 일본산 제품 불매와 일본관광 보이콧 운동은 바로 논개의 사상과 정신에서 발전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논개사당 내에 있는 영정 앞에서 숙연한 마음으로 참배를 하고 있는 관람객들의 모습


이런 시기에 대한민국 내일의 주인공인 청소년들과 가을 여행주간을 맞이해 일반 관광객들이 이곳 논개사당을 많이 방문해 역사적 현장에서 일본에 대항하며 나라를 위해 순절한 주논개의 정신과 사상을 보고, 듣고, 배울 수 있는 역사관광의 의미를 더욱 크게 확대해야 할 시점이며, 이곳 논개사당이 그 중심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위치 : 전북 장수군 장수읍 논개사당길 41
 
 


장수 논개사당 의암사 = 이상인 선임기자 lagolftime@tt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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