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리뷰] 어쩔래? 난 ‘태양의 후예’가 아닌 걸···
2016-04-01 16:40:47 | 박명철 칼럼니스트

학원비니 과외비니 그런 걸 쓸 형편이 되지 않는 아내는, 초등 6학년 딸의 영어를 자신이 책임질 테니 나는 수학을 책임지라 했다. 몇 차례 ‘고사’ 끝에 ‘허락’을 했는데, 이놈의 초등 6학년 문제집의 수학문제가 장난이 아니다. 별표가 그려진, 그러니까 딸이 풀다가 포기한 문제들은 딸이나 나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30년 전에 덮어버린 수학이 기억될 리도 만무하다. 한 문제를 한 시간 동안 끙끙대는데 해답을 풀이한 해설이란 것은 더욱 가관이어서 어째 읽을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중간에 서너 줄의 설명이 생략된 듯한,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그놈의 해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짜증이 나고, 골이 나고, 분노로 솟구쳤다. 그러다가 이제는, 한 시간 동안 해결되지 않는, 초등 6학년 수학문제와 씨름하는 나의 상황이, 그놈의 이해할 수 없는 해설만큼이나 이해되지 않았다. 아마도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터뜨렸을 것이다. 나의 말은 말이 아니라 폭탄이거나 독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이게 말이 돼?”

“그만두세요. 한 문제 갖고 한 시간 동안 풀래? 아는 것만 가르쳐줘. 왜 이깟 걸로 혈압 올리고 그래? 정민이 성격이 다 어디서 나왔게? 당신 성격 판박이야!”

 

아내는 불과 한두 시간 전에 이미 아들과 한판을 한 뒤였고, 그 후유증까지 몽땅 내가 뒤집어쓰게 됐다. 피해야 할 길로 들어서버렸다. 어이없이 꼬인 이 골목에서 뒤돌아서기에는, 너무 깊이 와버렸다. 이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 짜증을 더한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보면서, 동시에 태양의 후예와는 너무나 다른, 달의 후예조차 안 될 이상한 어떤 남자의 덜 떨어진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딸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듯, 미련곰탱이 같다는 듯, 쪽팔리게 이 사람이 내 아빠냐는 듯, 대체 엄마는 왜 이런 남자와 결혼할 생각을 했냐는 듯, 온갖 가소로워하는 듯한 표정이다.


▲KBS <태양의 후예> 캡처

세상의 모든 남편은 유시진 대위나 서대영 상사 같아야 한다고 믿는 녀석에게, 눈앞에 있는 이 엉성한 아빠라는 인간은 얼마나 한심할까?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어쩌랴, 나는 씨익 웃는다. 헛, 그렇게 웃으면 안 되는데, 이건 씨알만큼 남은 마지막 권위까지 스스로 내어준 꼴이다. 이런 완전 재수 드러운 날이 되어버렸다.


나는 포기! 그냥 나는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고, 이상하거나 덜 떨어진 이 땅의 수많은 사내들의 후예로 살아갈 수밖에. 대신 너는 유시진 대위나 서대영 상사처럼 세상에 하나 있을지 모를 남자와 만나 태양의 후예처럼 어디 잘 살아 보거라. 내 마누라는 다행히 스스로 태양의 후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 오래므로 나는 오늘도 한심하게 미련곰탱이로 살아가더라도 매일 밥을 차려준다. 그러니 내 마누라에겐 그놈의 유시진이나 서대영이의 꼬락서니도 비치게 하지 말라. 물들까 무섭다. 들어보니 그놈들의 달콤맬랑꼴리한 말투와 눈빛은 대륙의 여인들까지 녹아내린다지 않는가. 염병.


박명철 칼럼니스트

▶박명철 칼럼니스트는…

책,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들을 소재로 하여 밥을 짓듯 글을 짓는 문화콘텐츠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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